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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부인 오인성 여사

홍부반장 2020. 12. 10. 09:56

이번 포스팅은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광복의 밑거름을 마련한 독립운동가 ‘이재명’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알아도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려다 실패,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입니다.




이재명 의사는 1887년 선천에서 태어나 8살 때부터 평양에서 성장하였고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 후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 본토로 옮겨갔습니가.



그리고 그곳에서 안창호가 중심이 돼 창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이에 공립협회는 매국노(을사오적)처단을 결의하고 실행자를 선발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재명 의사 입니다.

 


이재명의사의 목표는 바로 매국노 이완용



​이완용이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재명 의사는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1909년 12월22일 이재명과 동지들은 학생으로 변장하고 이날 새벽부터 성당 부근에 대기하였고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재명은 감추었던 칼을 뽑아 그를 향해 달려들어 거사를 실행하였습니다.



상처를 입은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갔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이재명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당시 이완용은 목숨을 건졌으나 폐를 다쳐 죽는 날까지 폐렴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고 이날 이재명 의사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 뒤인 1926년 사망하였습니다. 




재판장에서 이재명의사는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결국 이재명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최후 진술을 했고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재명의사의 부인 오인성 여사는 당시 양심여학교 학생으로 남편의 거사를 만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씨 역시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변호인을 선임하는 등 남편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뒤 오씨도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오씨 역시 병을 얻어 29세란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재명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직계 후손이 없어 훈장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으며 고향도 평북 선천이라 생가나 일가붙이를 찾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형이 집행된 후 시신도 수습되지 않아 유골의 행방도 묘연하니 묘소도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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