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엥나의 블로그

임오의리!! 영조와 정조의 '의리' 본문

fun fun

임오의리!! 영조와 정조의 '의리'

홍부반장 2019. 8. 27. 10:57

이번 포스팅은 영조의 '임오의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드라마 '이산'과 영화 '사도'를 보신 분이라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조선시대 '의리'란 무엇일까요?

 

먼저 임오의리란 '임오화변'에 관한 영조의 의리 입니다.

 

 

드라마 '이산' 또는 영화 '사도'를 본 시청자라면 익숙한 한 장면!!

 

 

영조가 당시 대리청정 중이던 세자를 뒤주(쌀통)에 가둡니다.

 

 

그리고 뒤주 옆에서 울고있는 어린 세손

 

 

 

바로 영조가 자신을 대리청정하던 왕세자를 뒤주에 가둬 사망케 한 '임오화변' 입니다.

 

영조 38년인 1762년 임오년에 발생하였다하여 '임오화변'이라 칭하였고 이 사건 이후 사망한 세자를 '사도세자'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조는 자신의 친아들이 죽었는데 영조는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뒤 개선가를 울리며 궁으로 행차하였다고 합니다.

 

“아들 죽이고 개선가라, 이건 또 뭐지?”  “울려야지, 당연히 울려야지. 그게 주상과 우리의 의리야!”

 

이를  바라보던 노론계 대신들은 이것이 영조와 자신들의 '의리' 라 칭합니다. 

 

여기서 노론은 숙종이 사망할 무렵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반역 모의를 벌였다는 모함으로 고초를 겪은 세력입니다.

 

물론 경종이 4년만에 사망하고, 영조가 집권하자 노론의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의리는 의리이고 애통은 애통이니, 사적 애통으로 공적 의리를 가릴 수 없다."

 

영조는 세자가 질병으로 인해 법도를 잃었고 그 결과 변란의 기미가 급박했기 때문에 세자가 반역의 죄인이 되기 전에 부득이 사사로운 인정을 끊고 종사를 위해 결단한 것이라고  사도세자 처분의 정당성을 내세웠습니다.

 

 

사도세자를 비판하고 사망케까지 이르게 한 신하들의 행동을 대의로 평가한 영조의 '임오의리', 하지만 사도세자의 비극과 영조의 의리는 정조의 '임오의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선대왕(영조)과의 의리를 잊지 마시오, 주상”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마마마”

화 '역린'에서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옥새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왕과 대비 사이라지만 손자에게 ‘할아버지와의 의리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들립니다. 

 

 

성장한 이산(정조)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그간 금기시됐던 사도세자의 정치적 복권을 공식적으로 꺼내들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미덕을 지녔고 대리청정 때에는 문(文), 무(武)에 걸쳐 공업을 수립하였으나, 역적들의 이간책 때문에 사망하였으므로 왕으로 추숭될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지위도 왕으로 높이려 하였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론에 대한 보복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론 측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정조는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소론과 남인을 적극 등용, 당파간 세력균형을 맞추는데도 성공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의리'를 기억할테니 나의 '의리'도 인정하라는 것이 정조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