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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깡패 이정재!! 단성사 저격사건, 이정재 싸움실력은?

홍부반장 2021. 6. 22. 10:13

이번 포스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선을 넘은 욕망, 그 끝은?" 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50년대 이승만 정부시절 대한민국을 주름잡던 조직폭력배이자 정치깡패 이정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917년 1월 6일,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이정재는 마을 최고 장사로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만큼 당시의 교육수준으로 보면 고학력자 였습니다.

 

 

이정재가 조직폭력배가 된 계기는 결혼 후 동대문에서 광목장사를 할 당시,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주먹으로 성장하고 있던 김두한의 부하가 된 이정재는 김두한의 추천을 받아 경찰을 했으며 이후 대한청년단 종로구 동부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김두한의 정계 진출로 말미암아 종로의 조직이 사실상 정리되었고 또 6.25 전쟁 이후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를 매입, '가족회'라는 조직하고 상인들을 가입시키며 명실공히 동대문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이정재의 싸움실력은 그닥이었습니다. 씨름꾼이라 힘은 굉장히 세지만 싸움 실력은 없었으며 깡패 5명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이정재를 시라소니가 구해준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싸움 보다는 모략가의 였다고 합니다. 

 

처음 이정재는 동대문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하여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 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 요금을 2,000환~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습니다.

시라소니 린치사건

 

이정재 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몇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시라소니 린치사건 입니다. 

 

 

시라소니는 세력은 없었으나 당대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진 인물로 시라소니는 이정재에게 돈을 빌리고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계속되는 무리한 요구에 참다못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와 손도끼 등의 흉기로 시라소니를 무너트려 버렸습니다.

 

당시 시라소니는 왼쪽 허벅지를 빼고 성한 데가 없었고 이 마저도 병원에 입원한 후 이정재의 부하 이석재가 위문한답시고 찾아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쇠절구를 꺼내  왼쪽 허벅지까지 가격했다고 합니다.

 

 

조직폭력배 였던 이정재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이정재가 뇌물을 주고 경찰로 만든 고향 후배인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측근이 되면서 부터 입니다.

 

 

곽영주가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경무대경찰서장이 되자 이정재를 이승만에게 알현시켰고 이정재는 이승만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이정재는 막대한 재물과 함께 자유당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계까지 진출, 월권을 행사하며 야당 인사들에 대한 집회 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벌이며 소위말하는 정치깡패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야당 인사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로 지목된 이른바 제3세력의 동시 다발적 암살 기도를 기획하였는데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바로 단성사 저격사건 입니다.

단성사 저격사건이란 이정재가 자유당의 지시를 받아 세칭 제삼세력 살해음모를 계획했고 자신의 부하 김동진에게 조봉암, 신익희 등 40여 명의 인물들을 암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김동진은 이 명단을 폭로하며 계획은 무산이 되었습니다.

 

 

이정재는 김동진을 암살을 지시하였고 1955년 1월 29일, 이정재의 부하 이석재가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김동진을 저격 하였습니다. 김동진은 구사일생을 목숨을 구했고 이석재는 곧바로 구속

 

 

이정재 역시 살인교사죄로 구속하였으나, 곽영주와 자유당의 방해로 이정재는 석방되었습니다.

잘 나가건 이정재가 무너지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자신이 부통령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기붕과의 불화 때문이었습니다.

 

이정재는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하려고 했으나 서울특별시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이기붕이 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기며 이기붕과의 마찰이 생겼고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며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 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군사 정부의 조직폭력배 척결 사업 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군사 정부는 이정재에 대해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등으로 혁명재판에 넘겨졌고 결국 1961년 5월 21일, 재판에서 범죄 단체 수괴로 인정되면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판결 이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를 쓴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백주대낮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으며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향년 44세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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