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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장군!!희생과 고난으로 국토의 막내 독도를 지킨 영웅

홍부반장 2016. 10. 15. 15:29

희생과 고난으로 국토의 막내 독도를 지킨 안용복!!

학창 시절 안용복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짧게 기억이 나네요..

"어부였던 안용복이 일본으로가서 독도는 우리땅이다 라고 말했다!!" 이 정도 입니다.

하지만 안용복은 울릉도를 지킨 난세의 영웅 입니다. 이렇게 한 줄로 평가될 인물이 절대 아닙니다.

안용복은 그 당시 천민계층에 속하는 부산의 어부로 태어났습니다.

(1658년으로 추정, 당시에는 신분이 높지 않은 부류는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

1693년 좌수영 능노군(노젖는사람)으로 군역을 마친 그는 어민 40여명과 함께 울릉도 부근으로 전복을 따러 나갔다가

일본의 오타니 가문의 어부들과 부디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오타니에게 '도해면허'를 주어 울릉도와 독도근해의 어로활동을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안용복은 일본 어부들에게 왜 남의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느냐고 항의하다가 결국 박어둔과 함께

 일본 오키사마로 납치되고 마는데요(이를 안용복 1차 도일 이라 합니다. )

  안용복은 오키시마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젊은 날 안용복은 당시 부산포에 있던 왜관에 출입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고 합니다 )

<당시 울릉도 상황>

건국 이래 울릉도ㆍ독도에 관련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 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공도 정책이었습니다.

 태종은 두 번(1403·1416년), 세종은 세 번(1419·1425·1438년)에 걸쳐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소환했고 

조선 전기 이후 독도는 물론 울릉도에도 조선인은 살지 않았으며, 가끔씩 어업만 이뤄지던 상태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타케시마(竹島)’라고 불렀으며 일본 어민들은

1625년 무렵부터 막부에서 울릉도 도해를 허가받은 뒤 이곳에서 전복ㆍ물개 등을 잡아왔습니다.

  

 안용복 제1차 도일(1693년 3월~12월)

 1차 도일에서 안용복은 인질의 입장이지만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갔는데 억류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막부 로부터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서계를 써주게 했습니다.

이것은 17세기 무렵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 입니다.

이후 대마도를 거쳐

9개월만에 귀국한 안용복!!

마땅히 개선장군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안용복과 박어둔에게

내려진 것은 포상이 아니라

곤장 100대와 80대의 중한 처벌이

있었을 뿐 입니다 .

죄목은 월경(국경을 넘었다)이라 하네요

 

안용복 제2차 도일(1696년 5월~8월)

제2차 도일은 안용복의 자발적인 결행이었습니다.

1696년 1월 막부는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일본 어민의 도해ㆍ어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마도가 서계 접수를 미루는 바람에 여전히 어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자 안용복은 자신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는데요

그는 자신을 관리로 자칭해 도일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1차적으로 안용복은 1696년 3월 안용복은 조선 어민을 대거 이끌고 울릉도로 갔습니다.

안용복 일행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어민들은 예전처럼 조업하고 있었고

  안용복은 양국의 협약에 따라 그들의 월경죄를 꾸짖고 다시 호키 주로 갔습니다.(관리로 사칭^^)

그리고 그는 대담하게 행동했습니다.

호키 주의 수석과 담판을 짖고 대마도주의 죄상을 고발하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호키 주에서는 그것을 막부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용복의 계획은 그러나 난관에 부딪쳤는데요. 그 동안 조선과의 대일 통교를 담당해온 대마도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신분이 탄로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은 조선 조종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안용복이 조선의 관원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의 관례와는 달리 자신을 거치지 않고 막부와 직접 접촉하도록 조선 조정이 허락했다고 판단)

그 결과 안용복 일행은 목표했던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696년 8월에 조선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안용복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관리를 참칭하고 자발적으로 월경)

안용복은 1696년 8월 하순 강원도 양양에 도착했지만 현감에게 구금되었다가 며칠 뒤 탈출해 그동안 주로 거주한 동래부로 갔다.

그러나 9월 12일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비변사에 구금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당시 안용복에 대한 처벌과 관련하여 두가지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노론 대신들은 처형을 주장했습니다. 안용복의 도일은 건국 이래의 공도정책을 어긴 범경 행위이며,

대마도가 아닌 호키 주를 거쳐 막부와 접촉하고 정부문서를 위조한 것은 외교적 범죄라는 논거였습니다.

하지만 소론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범죄행위는 인정하지만 호키 주 태수를 직접 만나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막부에 주장한 것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런 공로를 인정해 감형을 주장했습니다.

  격론 끝에 안용복은 결국 유배형으로 감형되었고 유배형에 처해진 뒤 그의 행적은 알 수 없습니다.

 안용복의 두번에 걸친 도일이 있었기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토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조정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조선 조정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권이 분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고,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대응해 권리를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대마도)의 교섭태도가 변화했다고 합니다 . 그 동안 일본은 주로 억지와 기만에 근거한 외교를 유지해왔지만,

이 사건을 겪으면서 조선의 강경노선을 인식한 결과 유화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이익은 안용복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안용복은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현대에 와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휘호를 기증했고,

같은 해 10월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부산 수영사적공원안에 그의 충혼탑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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