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은 조선의 마지막황족 흥영군 이우왕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족이지만 친일파라 불리며 손가락질 받던 이우왕자의 5가지 진실은?
1. 만화 속 주인공 같은 출중한 외모
이우왕자는 일명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도 수려한 용모 때문이었는데요.
진한 쌍커풀과 시원시원한 눈매, 날카로운 콧날, 적당히 도톰한 입술은 여심을 단번에 사로 잡기 충분했습니다.
누구나 한번 보면 다시 뒤돌아볼 만한 외모로 일본 본토에서 유명했으며 당시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왕자가 일본인 왕자보다 잘생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참고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민남배우 고수가 이우왕자역을 맡았으며 엑소 수호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2.일제에 의해 일본군으로 키워졌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왕족들은 만 18세가 되면 일본 육군이나 해군에 무관으로 임관해야한다는 정책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조선황족을 일본의 군인으로 임명함으로써 일제치하의 조선을 정당화하는 홍보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우왕자는 1922년 11살의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갔고 15살부터 일본육군 유년학교에 강제로 입교되었으며 1929년 일본육국사관학교에 또다시 강제로 입교되었습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포병 소위로 임관, 도쿄에서 포병장교로 근무했습니다.
3. 일본인과 정력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과 결혼
일본은 덕혜옹주나 영친왕 '이은'처럼 이우왕자를 일본인 귀족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혼인을 해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냈습니다.
※ 참고로 박영효는 친일파 입니다. 하지만 의친왕은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판단했고 일본은 두 사람의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하여 결혼을 하였습니다.
박찬주와는 결혼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 편지도 주고 받았을 정도로 사랑하던 사이임은 확실합니다.
4.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사망
1945년 6월 일본은 이우왕자를 본토결전을 위해 히로시마로 부임을 시켰습니다.
당시 이우왕자는 자신운명을 직감했는지 전역신청을 하는 등 전쟁에 차출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직전 그는 식구들 앞에서 "일본으로 이제 들어가면 나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 손으로 처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가겠다."고 말하였고, 동생들과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말렸다고 합니다.
1945년 7월부터 이우왕자는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을 하였고 한 달뒤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사망했습니다.
독살설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설일 뿐, 공식적인 이우의 사인은 피폭사 입니다.
5.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우왕자는 사망 당시 일본 국적이었다는 이유로 그의 시신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사망한지 62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 언론을 통해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끝으로 이우왕자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직접적인 물증이나 증거는 없습니다.
항간에는 이우왕자가 중국 태원에서 근무할 당시 일본군에서 얻은 정보를 독립군에게 전해주고 또 독립자금을 지원해주는 등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알려졌습니다만 이는 루머로 밝혀졌습니다.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이 나오는 건, 민족 의식이 강했던 그가 아버지 의친왕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면 어땠을까, 라는 대중의 바람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우왕자가 친일파라는 소문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육사동기-
“당시 이우 공은 일본의 모든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 -가정교사-
"일본 오키나와가 미국에 함락되었단 신문을 읽으며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는데, 어릴땐 왜 웃는지 이유를 몰랐다가 성장해서 깨달았다" -이우 아들 이청-